Saturday 14 December 2013

다미엔 허스트 작품이 그렇게 중요해?

조나단 존스 2013년 12월 11일 수요일 12.26 GMT
theguardian.com

미신성의 아이콘...월요일 도난당한 다미엔의 두 작품 중 하나, Pyronin Y.
사진: PA 

다미엔 허스트의 점박이 그림을 아트갤러리에서 훔치기 위해 계획하고 부산을 떨 만한 가치가 있을까?

노팅힐 갤러리에서 그의 점박이 작품 두 점이 도난당했다는 이야기는 국가적으로 큰 뉴스거리가 되었다. 마치 렘브란트나 피카소 도둑처럼 말이다. 그러나 당신이 격자를 이루며 흰 바탕에 색색이 칠해진 동그라미들을 마음에 들어한다 할 지라도 이들이 예술사에 있어서 이들이 차지하는 자리는 매우 작다. 20세기 추상이라는 위대한 모험 가운데, 세기 말에 다가와 쿨하게 계획되고 프로페셔널하게 마감된 작품들의 도래는 로스코의 비극적 시선을 자조적 시트콤으로 대체하는 냉소적 에필로그였다.

예술작품을 훔치는 것은 도난당하는 물품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없는 것을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모나리자는 도난사건 이후에 더욱 유명해졌으며 20세기 초반에 복원된 바 있다. 우리가 허스트의 예술작품이 도난을 당할만큼 특징적인 것인가에 대한 결정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분명 그는 위대한 예술가임에 틀림없다.

추상예술은 근대세계에 있어 가장 위대한 업적들 가운데 하나이다. 추상예술을 힘있는 파라독스이며 양자역학에 버금가는 환각적 예술성을 지닌다. 이성적으로, 어떠한 형체나 풍경, 규명하거나 해석할 그 무엇도 없이 발라진 색채는 잘 봐주어 장식이라는 의미 외에는 아무 의미가 없어야 하는 것이 맞다. 이는 휘슬러의 작품 추락하는 로켓이 대중들의 얼굴로 던져진 물감통 같은 색의 추상적 줄기들이라 맹렬히 비난했던 빅토리아 시대의 비평가 존 러스킨의 악몽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20세기에 있어 추상은 근대예술에 있어 가장 심오하면서도 확고한 영역이 되었다. 몬드리안이 그의 우주적 형태의 놀이를 검은 선들과 채색된 사각형들로 채워나갈 때 그가 무엇을 하려했는지 말로 옮기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이 갖는 질서와 신념, 그리고 의미의 감각을 무시하기란 불가능하다. 잭슨 폴록의 라벤더 미스트, 혹은 로스코의 테이트모던 뮤럴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 어떠한 예술도 추상보다 의미있고 열정적인 것은 없다. 그러나 20세기 말에 들어서, 이 모든 것은 진부함이 되어 버렸다. 바넷 뉴먼이 좋아한 숭고한 권위에 대한 모더니스트의 주장은 포스트모더니스트의 놀림거리가 되었다. 허스트는 모순적으로 감상되어지길 구걸하는 흉내내기식 "모던 회화작품"들로 소진된 예술세계를 한결 재밌게 했다. 이들 작품들은 칵테일 파티에서 돋보이기 위한 작품들이며, PR회사 사무실을 장식하기 위한 작품들이며, 앞에 놓인 코카콜라를 비웃기 위한 작품들이다.

거기에는 엑스터시와 히스테리의 불안한 들뜸이 있다. 혹은 적어도 그랬다. 그러나 이 것은 그 어느 곳으로도 발전되지 않는다. 통찰로 이어지지 않으며, 상상력으로도 아니며, 진정한 추상예술이 가지는 신비로운 힘도 없다.

덴마크 텔레비전 시리즈 보르겐에는 허스트의 작품이 장식된 장소에서 정치회의가 열린다. 우리는 분명 그 회의가 주최하는 파티가 완전히 매진되었음을 추론해볼 수 있다. 허스트는 그런 존재이다 - 진정성 없고 가식적인 이들을 대표하는 국제적 상징말이다.

허스트의 점박이 그림들은 미신적 시대에 미신성의 상징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들 작품은 현대적 고전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작품 하나 훔치고자 길을 건널 마음은 추호도 없다.


(기사 및 사진 출처: http://www.theguardian.com/artanddesign/jonathanjonesblog/2013/dec/11/damien-hirst-spot-paintings-he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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