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2 January 2014

알랭 드 보통의 치유 미술에 대한 안내

알랭 드 보통
The Guardian, 2014년 1월 2일 목요일, 08,00 GMT

클로드 모네의 수련 (1899). 사진: National Gallery London
음악을 치유로 받아들이는 생각은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편이다. 우리 중 대부분은 훈련 없이도 영혼의 디제이가 되어 기분을 더 좋게 만들거나 현재의 기분을 전환하기 위한 곡을 멋지게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효과를 위해 시각예술에 눈을 돌리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정서적 삶을 위해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휴대기기에 즐겨보는 이미지 플레이 리스트를 갖고 있는 사람도 잘 없다. 컴퓨터에 개인 갤러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더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전형적으로 미술의 비용과 명성으로 인해 그러한 단계가 더 어렵기만 라다. 이런 체제가 미술을 보여주는 방식은 미술을 더욱 멀게만 느껴지게 할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술품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신경쓰며 줄을 서는 박물관 엄숙한 갤러리에서 많은 이들은 - 마음 속으로 - 혼란스러워 한다 (기프트샵이 좀 더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원작품보다 엽서를 보며 좀 더 알찬 시간을 보내기 훨씬 쉬울 수도 있으니까). 그림 아래 설명을 보면 중요한 날짜와 출처 및 알레고리에 대한 설명 등을 충실히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것이 우리에게 진짜 의미가 있는 것일까? 미술은 진정으로 무엇을 위한 것이어야 할까?
두 번째 질문은 저속하고 참을성이 없거나 단순히 답변 불가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는 위험한 생각이다. 미술이 그 것이 지니는 어마어마한 명성을 가지기에 합당한 것이라면 (난 그렇게 생각한다), 상대적으로 간단한 용어로 미술의 목적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 나는 미술이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음악이 그러하듯 말이다. 미술 또한 소망을 회복하고 고난을 의미있게 하며 동정심을 일으키고 웃고 궁금해하고 다른 이들과의 친교에 대한 의미 배양은 물론, 정의와 정치적 이상주의에 대한 감각을 되찾는 것과 같은 일들을 위한 통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술이 이러한 일련의 의미를 갖기에 있어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미술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는 (그 것이 얼마나 흥미롭건 상관없이) 원칙적으로 예술사의 기준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으로 우리의 더 깊은 자아로 우리 자신을 초청할 수 있는 심리학적 방식에 따라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미술을 읽는 심리치료적 방식은 어떠한 것일까? 아래 선정된 미술작품들이 그 길을 보여준다.

희망 
수련 (1899), 클로드 모네 (위)

모네의 그림은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가장 인기있는 작품들 중 하나이다. 이 작품은 "예쁘장함"에 대한 취향을 감상성, 더 심하게는 우둔함의 증세라 간주하는 많은 이들의 취향과 교양에 있어 염려스러운 작품이다.
이 염려는 이러한 종류의 미술에 대한 애착이 망상과 맞닿아 있기 때문일 수 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예쁜 정원을 좋아하는 사람은 전쟁, 질병, 정치적 오류 및 비윤리성 등을 포함하는 삶의 실제적 상황에 대해 잊어버릴 수 있는 위험을 갖는다. 관람객들은 지속적으로 이러한 종류의 물질적이며 고상한 미술 유형을 통해 이 점을 상기받지 않으면 실제 삶이 어떠한 것인지에 관해 망상에 빠지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은 문제를 완전히 잘 못 파악한 것이다. 우리 대부분에 있어 우리가 직면하는 최대의 위험은 자기만족이 아니다. 존재의 악에 대해 잊어버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진정한 위험이란 분노, 우울증과 절 망에 빠지는 것이며 사람이 하는 일에 대한 희망을 잃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절망이야말로 미술이 시정하기에 잘 드러맞는 것이며 예쁜 것을 향한 잘 세워진 대중적 열정을 제대로 설명하는 것이다. 봄에 핀 꽃, 푸른 하늘, 해변을 달리는 아이들... 이러한 것들이 희망의 시작적 상징이 된다. 발랄함은 성취한 것이며 희망이란 우리가 기뻐해야 할 것이다.

동정 
인생의 황혼 (1894), 시드니 털리

The Twilight of Life By Sydney Strickland Tully,사진: Art Gallery Of Ontario
다른 사람, 특히 나이든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힘들다. 털리가 그린 초상화 속의 나이든 여인은 등이 굽은 채로 삭막한 배경을 등지고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평소보다 훨씬 오랜 시간 이 나이 든 여인을 바라보도록 이끌림 받는다. 이 여인도 예전에는 강하고 결단력 있는 여인이었으리라. 한 때는 연인들도 있었을 것이며 고요한 떨림으로 조심스레 밤을 맞이한 적도 있을 것이다.
지금 그림 속 그녀의 모습을 사랑하기란 쉽지 않다. 아마 그녀도 이 사실을 알 것이다. 그녀는 이 점을 받아들이지 못 하고 외면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을 돌보아줄 타인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 모두 또한 언젠가 그녀의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더불어 많은 이들이 - 삶의 어떠한 단계에 있던지 - 언젠가는 스스로를 찬미하기에, 또 좋아하기에는 조금은 어려운, 그러한 순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사랑은 종종 찬미와 연결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흥미진진하고 사랑스럽다고 느낄 때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사랑에는 이면이 있다. 우리가 다른 이의 필요에 의해, 인자로움에 의해 감동될 때가 바로 그 때이다.
털리는 그림 속 여인에게 자애롭다. 화가는 그녀의 얼굴을 조심스레 들여다 보며 그녀가 정말 누구인지를 궁금해 한다.

보살핌 
14세기 베네치아 유리잔

Venetian glassPhotograph: Getty Images/DeAgostini
베네치아의 유리작품은 인류 역사에 있어 가장 정교한, 섬세한, 투명한 유리로 유명해졌다. 우리는 대부분의 때에 있어 강해야만 한다. 절대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 이는 우리가 놀이터에서 놀 때부터 알아온 사실이다. 우리 내면에는 연약한 부분이 늘 존재하지만 대부분 이를 숨겨둔 채로 산다. 그러나 베네치아 유리잔은 그 것이 지니는 연약함으로 인해 미안해하며 사과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가 지니는 섬세함을 인정하며 온 세상이 그들이 얼마나 깨어지기 쉬운지 이해하도록 한다.
이 작품은 실수로, 혹은 부족함 때문에 약하게 만들어 진 것이 아니다. 그 것을 만드는 장인이 튼튼하고 억센 작품을 만들려다가 - 바보같이 - 아이도 부러뜨릴 수 있을 정도에 그치고 만 것이 아니다. 정제성을 추구하는 것에 대한 결과로, 햇빛과 촛불을 그 깊이 그대로 맞이하고자 하는 열망에 의한 결과로 연약하고 쉽게 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유리는 멋진 효과들을 성취할 수 있지만 그 대신 연약하다. 이는 번창하는, 연약함이 허락되는 환경을 만들기 위한 인간 활동의 더욱 섬세한 형태를 허락하는 문명의 의무이다. 유리잔이 너무도 깨뜨리기 쉽기 때문에 우리는 손가락을 더 부드럽게 사용하게 된다. 이 것이 바로 음료잔이 말해주는 온화함에 대한 윤리적 이야기이다. 이는 중용이 다른 사람들에게 진정한 차이점을 만드는 삶의 더욱 중요한 순간들을 위한 훈련이다. 성숙하다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 가하는 힘이 미치는 영향력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최고경영자들이여, 이 점 참고해 주시길.

슬픔
페르난도 페소아 (2007-08), 리차드 세라

Fernando Pessoa, 2007-8, by Richard SerraPhotograph: David Levene for the Guardian
우리는 고통받고 있을 때 극도로 외로워지곤 한다. 찬양이 성공하는 낙관적인 세상에서 우리의 불행은 수치감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그냥 슬픈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우리만 슬퍼보이기 때문에 슬픈 것이다. 우리는 삶에서 고난을 지워버릴 수 없지만 좀 더 성공적으로 고난을 받는 법 - 즉 박해의 느낌이나 불공평하게 우리 혼자만 벌을 받고 있다는 인상 없이 고통받는 법을 배울 수는 있다. 페르난도 페소아는 리차드 세라가 포르투갈 어느 시인을 애도하며 그의 이름에서 가져와 제작한 아름답게 어두운 기념물이다 ("오 소금기 머금은 바다여 / 그대 가운데 얼마나 많은 소금이 포르투갈의 눈물에서 온 것인지").
이 작품은 우리의 슬픔을 부인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기운내라고 말하지 않으며 좀 더 밝은 방향으로 인도하지도 않는다. 이 침울한 조각품의 큰 스케일과 기념비적 성격은 슬픔의 정상성과 보편성을 선포한다. 그리고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엄숙한 감정의 합법적 장소를 인지하며 이에 반응할 것을 자신한다. 
이 작품은 우리를 더욱 어두운 기분에 홀로 남겨두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감정을 삶의 중심에 나타낸다. 다른 많은 위대한 미술작품에서와 같이 작품이 갖는 어두운 중력 내에 슬픔이 자리할 위엄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다.

일 
린넨 옷장에서 (1663), 피터르 데 후치

At linen closet, by Pieter de Hooch (1629-1684)www.bridgemanart.com
17세기 네덜란드 장르 화가 피터르 데 후치가 그린 이 평범한 집안의 한 장면에는 두 명의 여인이 집안일을 하며 바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장면에는 군인도, 왕도, 순교자도, 신성한 인물도 없다. 오늘날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일상의 평범한 삶이다.
매일 해야하는 일들에서, 그리고 우리가 사는 환경에서 아름다움과 흥미를 발견하기란 어렵다. 가야할 일자리가 있고, 지불해야 할 공과금이 있고, 청소해야 할 집이 있으며,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요구사항들에 깊이 분노한다. 린넨 옷장은 그 스스로도 이미 쉬이 분개할 만 한 것이다. 이는 지루하고 평범하며 심지어 섹시하지 않게 보일 수 있는 것의 좋은 예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우리가 그림의 메세지에 담긴 진리를 인지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화가와 같이 우리가 만일 평범한 일상의 가치를 인식하는 법을 알았다면 우리가 지는 짐들의 많은 부분이 가벼워 질 것이다. 또한 삶의 큰 주제인 번영, 행복, 좋은 인간관계 등은 우리가 소소한 것들에 접근하는 방식을 바탕으로 온다는 것에 기초한다는 것, 즉 올바른 태도에 기반한다는 교훈을 들려줄 것이다. 문 위로 보이는 조각상이 바로 그 단서이다. 이 조각상은 돈, 사랑, 지위, 활력, 모험을 상징한다. 린넨을 관리하는 것은 이러한 더 큰 소망들에 반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소망들로 가는 길이 된다. 우리는 우리를 포함하여, 그러한 하찮아 보이는 것들을 돌보는 사람들의 매력을 보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 점이 바로 많은 이들이 이 그림이 희망적이라 사랑하는 이유이다. 이 작품은 우리가 저 깊이에서 알고 있는, 바로 화가가 말하고자 하는 중요한 점에 대한 계시이다.

감사
목가: 다프니스와 클로에 (1500-01), 니콜라 피사노

Niccolo Pisano An Idyll: Daphnis and Chloe사진: Copyright The Wallace Collection
다프니스와 클로에에서 피사노는 사랑의 시작, 상대방의 감미로움과 은혜가 우리에게 강렬하게 존재하는 순간을 되살린다. 다프니스는 클로에를 너무나 소중히 하여 감히 손을 대지 못 한다. 그의 헌신, 그의 영예, 미래에 대한 그의 희망은 모두 다채롭기만 하다. 그는 그녀를 가치롭게 여긴다. 그러나 그녀도 그를 사랑할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 하고 이러한 궁금증은 그의 미묘한 감정을 더욱 증폭시킨다. 그의 눈을 보면 절대로 그녀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랜 지속된 관계에서 나타나는 상대방을 전적으로 익숙하게 여기는 습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 그림은 잊혀진 감사와 놀라움의 감정을 되돌리는 힘을 가지고 있기에 더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관계 
부엌에서의 고뇌 (2012), 제시카 토드 하퍼

Jessica Todd Harper The Agony In The Kitchen.Photograph: Copyright the artist
우리는 관계라는 것이 갖는 이미지에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란 많은 경우에 있어 우리가 어떤 다른 이와 함께 행복해질 기회를 깊이 기만하거나 해롭기 쉽다. 사람들이 그들이 갖는 관계에 대해 말할 때 온전하게 진정성을 가지고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침묵 뒤에서 우리는 성인으로 사는 삶에 있어 가장 큰 도전 중 하나, 즉 다른 누군가와 함께 행복해지는데 성공하기를 통해 개인을 발전시킬 필요를 마주한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가 슬픈 동시에 정상적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예술작품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고 헐리우드의 달콤한 이미지에 완전히 반대되는 이미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가정폭력의 극한 상황은 실제로는 드물다. 그러나 매일 매일의 어려움은 보편적이다. 종종 보여지지 않고 드러나지 않긴 하지만 말이다.
제시카 토드 하퍼의 이미지에 있는 커플은 좋은 저녁을 계획하였으나 모두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한 사람은 격앙된 모습을 보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아마도 울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하게도 이들은 좋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정죄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서로를 좋아하지만, 진정으로 어려운 문제에 처해 있다. 이는 우리 모두가 한 번 쯤은 경험한 것이다.
미술은 지인들과 나누기에는 너무나 특이하고 용납될 수 없는 진리를 담을 사적인 저장소로 기능할 수 있다.

소비주의 
야채 과일의 정물과 함께있는 시녀 (1620‑05), 나다니엘 베이컨

Cookmaid With Still Life Of Vegetables And Fruit사진: Tate
소비주의가 악이라는 생각은 근대 세계를 괴롭힐 채찍이다.그럼에도 소비주의는 지구 상의 열매들에 대한 사랑과 인간의 독창성에 대한 기뻐함, 그리고 조직화된 노력과 무역의 광대한 성취에 대한 감사에 기인한다. 이 작품은 풍요로움이 여전히 새롭기만 했을 당시, 그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때로 우리를 데려간다.
우리는 욕심을 너무도 두려워하여 물질적인 것들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명예로울 수 있는지 잊어버린다. 1620년에는 일과 통상의 고귀함, 오늘날 지루함과 죄의식에 덜 접근하게 만드는 무엇인가에 경의가 표해질 수 있었다. 아마도 우리는 이 그림을 통해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소비주의에 대한 선한 반응은 멜론과 포도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제공받을 수 있다는 점에 있어 진짜로 요구되는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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